속고만 살았네

찔찔거리는 불행포르노로 시작하는, 희망의 이야기

모든 걸 바꾼 한 장의 검사지

“당장 쉬셔야 합니다”

백혈구 수치가 정상치의 1% 입니다. 

..예?

“뇌 염증 심각하시구요, 호르몬 불균형으로 세로토닌, 도파민, 코르티솔 등등의 회로들 싹 망가지셨구요, 만성 스트레스의 지속으로, 세포 단위 손상이 수 년간 누적되어 미토콘드리아 기능이 26% 밖에 안되고 간기능 과부하에, 언제든지 쓰러지면 자가면역질환, 장기 부전 등이 발발할 수 있는 상태로.. 즉각적인 휴식을 권고합니다”

바이오해킹 포럼 가서 하버드에서 연구 중인 인증 정확도 99% 까까운 최신 피검사라길래.. 그냥 재미로 해본 거였는데. 무시무시한 결과가 나와버렸다.

내 인생 참 기구하다. 기껏 잘되려나 했더니만. 역시, 내 인생이 그럴리가 없지 ;)

20년간 속고만 살았던 나

겉으로 보기에 난 모범생이었다.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모범생. 부잣집 딸. 학생회장. 전교 1등. 자사고. 연세대. 엄마는 성당에서 구역장. 학부모회. 이사회. 봉사단장. 전직 대학 여신. 사모님.

그런데 내 건강내역은 이랬다:

13살 소화불량. 불면증.
18살 골다공증. 학교에서 쫓겨날 뻔함.
22살 알콜 중독. 담배. 게임 중독
24살 PCOS. 우울증. 공황장애. 대인기피. 번아웃. 자퇴. 가출. 연체
29살 ADHD 진단
30살 자가면역질환, 쓰러지기 직전이란 진단 받아들고 모든 사업 중단.

… 그리고, 이전 모든 진단 들은 원인이 *C-PTSD 하나인 것으로 드러나.

5명의 의사. 7가지 다른 진단명. 수십 개의 약.

그런데 알고 보니 이게 다 하나의 원인 때문이었다.

정신병도, 호르몬 이상도, 면역질환도 아니었다.
내가 태생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전부 어린 시절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그것도 내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C-PTSD: 복합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뜻함. 한 번의 큰 사고가 아닌, 오랫동안 반복되는 상처나 트라우마로 생기는 마음의 병. 특히 도망칠 수 없고, 무력하게 갇혀 있는 상황에서 생김.. 마음의 병이라고는 하지만 과학적으로 자가면역 질환, 호르몬 질환, 우울증, 공황 장애 등과 (위에 내가 진단받은 대부분의 질환과의) 명확한 상관 관계가 드러나고 있음.

나는 기억나지 않는 내 과거

사람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충격을 받으면 그 기억을 분리한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은 무의식과 세포 사이사이에 저장되어, 몸이 완전히 안전해질 때까지, 뇌 깊은 무의식 속에 저장된다.

그리고, 그 이후로 일어나는 인생 모든 것에 관여하게 된다. 인격체가 트라우마 주위로 형성이 되는 것이다.

이는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유의미하다. “위험”을 피하도록 설계하는 것이 뇌 알고리즘의 1순위 우선순위인데 너무 큰 위험을 겪으면, 뇌는, 감정 회로를 차단하고, 기억을 인지 능력에서 분리시킨 다음 몸 구석구석에 신호 형태로 저장한다.

“지나치게 큰 위험” = 전쟁 혹은 얼음.

그리고 그런 일을 겪은 사람은 그런 일을 겪지 않는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세상이 위험하다”고 자신도 모르는 채 생각하고 행동하며 사람을 경계하고, 그 일 비슷한 냄새, 소리, 이미지 같은 것들만 봐도 온 몸이 굳어버리며, 따라서 그 일을 떠올리게 할 만한 일 근처에도 가지 않는 것으로.. 그렇게 하나의 사건이 그 사람 인생 전체를 결정지어버리는 것이다. 뇌 구조도, DNA 도 영원히 그 사건 주위로 바뀌는 것이다.

내 어린 시절은 정말 끔찍한 학대였다.
그러나 그게 학대였다고, 잘못된 일이라고 소리내어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20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말할 용기가 없었던 게 아니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잘못된 건지도 몰랐다.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사는 건 줄 알았다.

인간의 뇌란 참 신기하다. 불편한 기억을 스스로 편집하고 잘라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 몸은 거짓말을 못한다.

기억은 나지 않는데, 인생이 자꾸만 이상하게 흘러간다.

트라우마라는 기생충

트라우마란 마치 기생충과도 같아서. 숙주는 자신의 뇌가 조종당한 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수십년을 살아가기도 한다. 그리고 죽는다. 대부분의 인간은, 그 한 번의 경험이 자신의 인생을 뒤흔들어 놓았지, 라는 것도, 내 모든 생각과 결정에 사실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껍질처럼 살아간다.

우린 큰 충격으로 사람을 믿지 못하고, 사회를 두려워하게 된 사람을 두고 환자, 라고 불러야 할까? 안타까운 사건으로 인한 불량품? 혹은 인간의 진화?

처음에는 환자가 아니었겠지만,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은 대게 수십년이 지나, “우울증”, “자가 면역 질환”, “불안, 공황”, “ADHD”, “대인기피장애”, “은둔형 외톨이”, “분노조절장애”, “호르몬 불균형” 등의 이름으로 병원을 찾게 된다. 드디어 환자가 되고서야, 묻는다.

“대체 왜?”나한테는 아무 일도 없었는데,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다

그 질문은 대게, 수 개월, 혹은 수 년을 뭔가 이상하다, 몸이 왜 이러지? 하는 찝찝함과 답답함 속에서 살아오다가, 어느 날 결국 일이 터져 병원을 돌며 돈 백만원 들여 모든 검사를 끝낸 후.. 원인이 불명확하다는 성치못한 진단을 받고서야 터지게 된다. 사실 이 중 또 많은 경우의 사람들은 병원조차 가지 않고 “본인의 성격탓”이라던지, “의지탓”을 하며, 사회에서 천천히 도태될 뿐이지만..

만약 병원까지 가는 용기를 냈다면, 여기서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한다.

“재수없네, 어쩔 수 없지” 하고서는 약을 타 먹는다. 문제는 낫지를 않는다. 몇 달이고 몇 년이 되어도. 아니 오히려 나빠지는 것 같은데? 병원에서는 약을 더 준다.
보충제도 잔뜩 사본다. 운동도 식단도 추가한다. PT 받아봐야 하나?

그렇게 병원에 쓰는 돈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지만, 한 번 늘어난 먹는 약의 양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그리고서는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다.

가족은 늘어가는 약을 보며, “문제가 해결됐다”고 간편하게 생각하고, 문제를 알았다고 안도한다. 희망한다, 언젠가 나아지겠지. 이제 환자가 된 당사자는 영문을 알 수 없으니 좀 억울하지만, 어쨌든 건강 챙겨 나쁜 것 없으니 열심히 약을 먹는다. 안그래도 과로에 찌들어 있는 의사들은, 질문하지 않는다. 아직도 우울하세요? 네, 용량 높여드릴게요. 술 그만 드세요. 보험비나 타먹으면 그만이다.

그래서,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다.

첫째, 아무도 왜 그런지 모르고. 둘째, 안그래도 너무 바쁜 사회이니까. 소득 없는 질문을 해서 뭐하나?

그리고, 답을 알면, 우린 감당한 자신이 있나? 우리 사회에는 상처받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나한테 불행의 냄새가 나나봐

여기서 더 무서운 진실이 있다.

트라우마는 단순히 내 몸만 망가뜨리는 게 아니다. 내 인간관계, 사회적 위치, 모든 것을 결정한다.

불행은 불행을 부른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악순환의 굴레.

사회는 남들 아픈 것에 관심이 없다. 우리 사회에는 아픈 사람이 너무나 많다. 본인이 환자라고 자각하는 사람은 대게 피해자다. 가해자는 결코, 본인의 정신병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리고 사회는 결코, 피해자 편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물고 뜯을 팝콘이 필요할 뿐이다. 그래서 “힐링”은 오롯이 환자의 몫이 된다. 시작부터 칼빵 맞고 시작해서 체력도 의지도 정신도 다 구멍나버린 사람은 돈도 시간도 힘도 없다. 그러나 돈 없는 사람에게 시간 내 줄 “정상인”은 없다.

정상인들 사이에서도 서로 흠 잡아 가치 깎아내리기 바쁜데, 이미 흠이 드러난 불량품은.. 생존할 수 없다.

가정폭력의 피해자들은 .. 위로? 치유? 아니, 사회에서 가장 먼저 물어뜯기는 먹잇감이 된다. 물어뜯겨서, 우리보다 더 밑으로 내려가서, 우리 발닦개가 되어줘.

그런 곳에서 자신의 상처를 드러낸 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으므로, 사람들은 상처를 드러내기 보다는 자연스레 공격성을 드러내게 된다.

궁지에 몰린 개새끼가 한 번 물어보려고 발악하는 꼴이나 다름없는데, 사회 어딘가에는 무조건 그 사람보다 더 약한 사람이 어딘가에 있기는 해서.. 이렇게, 사람들은 범죄자가 되고 비행 청소년이 되고 학교 폭력의 가해자가 되며, 가정 폭력범이 된다.

야생에서 사냥할 때 사자는 무리의 가장 약한 새끼나 부상당한 개체를 노린다

그리고 사람들은 동물적인 육감으로 이 냄새를 맡는다.

나르시스트들, 사이코패스들, 기회주의자들이 당신 주위로 벌떼처럼 몰려든다. 왜냐하면 당신이 “완벽한 먹잇감”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인간 쓰레기들의 아모르 파티

한때 부푼 꿈을 가지고 만들려고 했던 게 호텔이었었다. 사람들을 치유하는 호텔. 진심을 다했으니까, 올바르게 하니까, 사람들이 마음을 알아봐주겠지.

알아봐주기는 했다. 생각보다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별볼일 없는 내 이야기에도 같이 일을 하자는 사람들이 있었고, 선뜻 투자해주신 대단한 분들이 생겼으니까.

그러나 그 사이에는 수많은 기생충들이 끼어있었다. 따뜻함을 먹으러 온 벌레들.

같이 일하러 끼어 들어온 벌레들 중에는 돈 다 넣고서 발 묶이고 나서 보니 알고보니 들어온 다른 파트너랑 불륜하려고 들어온 사람도 있었고,

내 편이라고 이제는 진짜 가족이라고 하던 사람들 중에는, 믿고 맡겼더니 뒤로 장부 조작하고, 주식 조작하고, 나한테 사기 치고, 모두 나에게 뒤집어 씌우고 우리 직원 써서 내 뒤로 똑같은 사업 차리려고 영업비밀 빼러 오는 사람 있었고,

심지어 내 투자자들한테 전부 내가 트라우마 때문에 정신이 불안정하고 믿을만하지 못하니, 자기가 나를 쫓아내고 사업을 대신 하겠다며, 나를 너무 사랑해서 그러는 거라고 이야기하고 다니는.. 그러고서는 매일 나한테 전화해서 윽박지르고 내 모든 컨텐츠를 검열하는.. 행복해보이면 전화해서, “너 참 불행하고 정신이 온전치 못하니 우리가 필요하다”라고 저주하는.. 더러운 기생충들로 그득했다.

내가 왜 이런 것들만 끌어당기는지 알겠더라.

내 안에 있는 “착한 아이”, 피해자 의식, 경계 없음—이 모든 게 “나를 이용해도 됩니다”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이 모든 게 내가 기억조차 못하는 어린 시절 트라우마에서 시작됐다는 게 가장 억울했다.

내 인생 나한테 어떻게 그래?

내가 사기당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너무 허탈해서, 두 달은 허공만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럴 리가 없어” “내가 잘못 안 거겠지”

그 사이 그걸 나에게 덮어씌우려고 몇 달을 투자자 및 내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리며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며 나를 미친 사람으로 몰아가는 저 인간 쓰레기들 사이에서.. 나는 태어나 있어본 적도 없던 인간에 대한 신뢰를 또 잃어버렸고,, 싸울 힘이 없었다.

그러다가 또 분노하면서, 두 달은 경찰에 가서 신고하고 소송하려고 준비했다.

그리고 마지막 두 달은, 맘 고쳐먹고 잘 해결해보려고 했다. 나는 정직하게 사업했으니까 알아봐주겠지. 이게 끝이 아니야, 살릴 수 있어.

그때 때맞춰, 검사 결과가 도착했다.. 그건 내 몸이 이십년 만에 보내는 최종 경고장 같은 것이었다.

진짜 힐링은 아름답지 않다

검사 결과지를 받아들고서는 두 달 간 모든 걸 끊었다 술, 담배, 커피, 심지어 인스타그램, 왓츠앱, 친구까지도 그러고 방에 우두커니 홀로 앉아 있었다.

명상이니, 힐링 푸드니, 좋다는 건 다 정석대로 했지만 영 몸이 좋아지지를 않았다

누구에게 설명하기도 곤란했다. 하나의 명확한 대단한 병명이 있어야만, 사람들은 “쉼”을 이해해주지 않는가?

쉼이란 존재하지 않는 현대사회에서, 아무리 아프다고 설명을 해도, 아 힘들겠다.. 빨리 나아 말만 최대한 동정심을 담아 하고서는 관심을 끄고, 그래도 이정도는 할 수 있지 하며, 이메일 하나, 업무 하나, 처리할 영수증들과 다양한 문제들을 상기시켜줬다.

문제는 밥도 잠도 못자고 온몸에서 열이 나는 상태로, 기분이 쉼없이 오락가락하고 머리가 핑핑도는 상태이지만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하지 않은 이상 연락도 일도 계속되어야 하는 현대사회에 살고 있다는 점이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가면역질환이 언제든 발발해, organ failure 등이 올 수 있고, 그 경우 뇌에 혈류가 차단되면서, 불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라는 무시무시한 수치를 받았지만, 사람들은 사람이 죽든 말든, 이 사람이 죽기 전까지는 자기 문자 답장 빨리 받는 게 더 중요한 것이었다.

힐링의 진짜 모습. 새벽 2-6시, 잠 못들며 나오는 불편하고 어두운 기억들과의 조우. 내면의 비뚤어진 아이들 이야기를 한명씩 듣고, 그때의 분노, 슬픔 등을 고스란히 느끼고, 온전히 이해해줘야, 그 아이가 더 불행해지지 않는다.

깨달았다. 아무도 나에게 신경쓰지 않는구나.

평소 착하고 바르고 열심히 산다 자부했지만, 모르는 사람들에게 힘이 닿는대로 호의를 베풀고, 좋은 지식도 무료로 나누고, 내 시간도 나누었지만 그 사람들 중 내가 아플 때 그 누구도 내 옆에서 간호하거나 이야기를 들어주려하지 않았다, 가끔, 가끔 연락해서 전화해서, 아 참 힘들겠다, 언제든지 전화해, 하는 정도가 기껏인 친한 친구 몇을 제외하고는

나는 그저 이용하기 편한 착한 호구였다는 것을 그렇게 깨달았다. 잘못된 사람들과 어울리며 인생을 잘못 살고 있었다는 것도.

착한 아이 증후군

학교에서 말하는 것과 달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덕적이지 않다. 도덕적인 척 해야 살아남기에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선에서 도덕적인 시늉을 하는 거지, 사람들은 길에서 사람이 죽어가도 본인에게 손해가 되면 도와주지 않는다.

연인 관계, 친구 관계도 엇비슷하다. 현대사회에서, 모두가 항상 이득을 보려고 무한한 선택지 속에서 사는 이 세상에서는 하나의 선택지가 효용이 떨어지면 다음 선택지로 넘어가면 그만이다. 그래서 누군가 아프거나, 귀찮아지거나, 시간과 돈을 앗아가면 손절하면 그만이다. 그래서 바르고 착하게 사는 사람은 만인에게 이용당하고, 쓸모가 다하면 버려지고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사라지고 있었다. 열심히 살아서, 모든 걸 다 참아서, 묵힌 감정이 간에 장기에 저장되어 만성 코르티솔과 간 과부하로 호르몬 체계가 망가졌고. 그래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고, 기쁨을 느낄 수 없었고, 몸이 셧다운 되어, 소화도, 수면도, 모두 엉망이라 밥을 먹을 수가 없어서, 육수랑 주스만 마시면서 몇 주를 버텼다.

밤에도 낮에도 잠이 아예 오지 않거나, 좀비 같은 상태로 분노와 슬픔으로 가두어두었던 수십년의 어두운 기억들을 하루종일 영화처럼 돌려보며.. 착하게 살다가, 이용만 당하다가, 마지막에 사기까지 당하고. 사기를 당했는데 사기친 놈들 죄도 뒤집어쓰고 죽을 판이었다.

억울했다. 다 거짓말이구나.

사람들이 이용하기 좋으라고 “착하게 살라” “바르게 살라” 입버릇처럼 이야기하고 그러한 사상을 퍼뜨리기 위해 드라마니 영화니 나오지만, 내가 30년 살아온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착한 사람들은 참고 당하다가 돈도 건강도 뺐기고 찍소리도 못하고 죽었고, 이용당했고, 가두어졌다.

법도 사회도 약자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약자는 지워진다. 피해자는 피해자라는 이유로 2차, 3차 가해를 당하고 사라진다. 그게 우리 사회다. 인간은 그저 아닌 척 지속적으로 발악하는, 이빨 지닌 짐승일 뿐이다.

결심을 한다. 착한 아이로 살아서 이 모든 일이 벌어졌으니. 모든걸 다 참고, 좋은 게 좋은거지 마무리하려고 항상 손해보고 끝낸 덕에 내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이제는 야생을 직시하고, 약육강식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 약자로 더이상 살지 않겠노라고, 나는 무조건 “살아남겠다”. 고 말이다.

사업은 접습니다

그동안 사기 당한 것조차 사람을 잘 못 본 제 탓이라고 생각해서 방에서 제 탓만 하느라, 저를 찌른 사기꾼들이 사방에 매일 전화를 돌리며 자기들이 피해자인양 그걸 제 탓으로 하고 다니는데, 저만 바르고 올곧으면 사람들이 알아줄 줄 알고, 아무말 없이 저는 방에서 명상이나 하고 있었습니다만.

그들은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은 제가 말이 없으니 시끄러운 사기꾼들의 말을 믿는 듯해 보이더군요. 그래도 제가 시작했으니까, 하면서, 다 끌어안고 제가 마무리까지 잘 책임져보려고 했으나. 그래도 너무 억울해서요. 그리고 몸이 아파서요. 저한테 더 못할 짓인 것 같아서 이쯤에서 그만하려고 합니다.

죽을까도 생각했는데, 이래 평생 당하고만 살다가 죽어버리면, 저한테 미안한 것 같아요. 그래서 죽지 않고, 법대로 사기꾼들 응징하고, 경찰에 신고하고, 투자자분들께 최대한 원금 보전할 수 있게 절차대로 법인 자산 처분하고 돈 되돌려드리는 선에서 제 도덕적 책임을 다 하려고 합니다.

많이 힘들었습니다. 사기 당한 것도 제 책임인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제가 제 탓한다고 달라지지 않더라구요. 세상은 알아주지 않더라구요.

착한 아이, 여기 잠들다

저는 극심했던 아동학대의 생존자입니다.
수많은 정신질환 진단을 받았고, 오랫동안 "착한 아이"로 살아왔습니다. 말 잘 듣고, 민폐 끼치지 않고, 피해자로서 적당히 억울해 보이되 지나치게 무겁진 않아야 사회가 받아주는 그런 사람.

그게 너무 오래였어요.

그래서 저는 진심으로 제가 잘못 태어난 줄 알았습니다.
왜 계속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도대체 어디서부터 망가졌는지…
아주 오랫동안 저는 죽을까,를 ‘선택지’처럼 매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표정은 괜찮은 척, 목소리는 밝은 척, 그렇게 진심을 감추고 살았지만, 제 안에는 항상 그 끝 생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말만은 확실히 할 수 있어요.
트라우마는 정체성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 그걸 몸으로 증명하며 살고 있습니다.

최근 몇 달 동안, 저는 본격적으로 회복에 들어갔습니다.
의사와 상담 끝에, “진짜 회복”을 위해 6개월 동안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나기로 했습니다.
내일, 저는 유럽으로 떠납니다.
폰도 없이, 노트북도 없이,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정처없이 떠돌며 살기로 했습니다.
이건 여행이 아니라, 제 인생 전체를 건 회복 실험입니다.

내 몸과 뇌가 과연 자유 속에서 어떻게 바뀌는지,
제가 직접 기록해보려고 합니다.

그동안 저는 후성유전학(epigenetics)과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 그리고 소마틱 힐링(somatic healing)에 대해 공부해왔습니다.
과학은 말합니다.
사람의 몸과 뇌는 바뀔 수 있다고.
유전자 발현은 고정된 게 아니고, 뇌는 평생 새롭게 재설계되며, 몸은 기억을 품고 있지만 그 기억은 완성될 수 있다고.

저는 지금 그 이론들을 제 삶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트라우마를 말로만 정리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풀고 있습니다.
나를 죽일 듯 때리던 사람에게 오히려 웃어보이던 그 아이,
매일 죄책감에 잠 못 들던 그 아이,
모든 걸 내 탓이라 여기며 숨 죽이던 그 착한 아이를,
이제는 보내주려 합니다.

엄마와 사회가 저에게 씌워놓았던 가짜 자아를 오늘 여기 묻습니다

잘 자라, 사회가 만들어준 내 가짜 자아.
이제 나는 진짜 나를 만나러 갑니다.

연말쯤, 이 회복 실험의 결과를 혈액검사 수치로 보여드릴 수 있을 겁니다.
염증 수치, 호르몬 지표, 백혈구 수치—all of it.
자유가 몸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그걸 저는 직접 보고, 직접 느끼고, 기록해서 나누려 합니다.
누군가에게, 지금 어둠 속에 있는 누군가에게, 작은 불빛이 될 수 있다면.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이제 저는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괴상한 머리도 하고, 말 없이 잠수도 타고, 맘대로 연애하고, 하고 싶었던 걸 미루지 않고 해볼 겁니다.
“모범생”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가둬왔던 모든 가면을 벗고,
그냥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 겁니다.
연말까진, 아니 어쩌면 더 길게.

그리고 그동안 쌓여온 오해들, 제 이야기들을 마음대로 평가하고 소비해온 사람들, 저를 ‘공공 자산’처럼 생각하던 사람들과는 이쯤에서 선을 긋습니다.
저는 이제 제가 아끼는 사람들과만, 제 마음을 나누겠습니다.

혹시 지금 어디선가, “나만 이런가” 싶어 숨죽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습니다.

아니,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그 고통이 영원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의 몸은, 뇌는, 유전자는 지금도 회복하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그 가능성은, 진짜입니다.

저는 그걸 증명해볼 겁니다.
자유가 몸에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6개월 후에 다시 뵐게요.

저는 이제 막 처음으로 살아가 보려고 합니다.

다음 화부터는 이제, 여러분께 이득이 되는, 실용적이고 희망찬 야생 서바이벌 가이드로 찾아뵙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영문으로 발행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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