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과거를 고백합니다

주의: 아동학대 / 우울증 묘사가 있습니다.

나에게 씀이라는 행위는 치유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던 유년시절의 내게 목소리를 부여하는 행위다. 
소리지르고, 악을 쓰고, 애를 써도 그 어디에도 닿지 않던 나의 이야기가 세상에 들린다.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생의 증거. 펜 촉이 지나간 순간 생기는 팔딱팔딱하니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흔적을 보고 있는 게 좋다.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흰 지에 검게 흩어져 지워지지 않는 그 자취. 

사실, 어린 시절의 많은 일들은 제게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다지 즐거운 어린 시절이 아니었다는 것을 빼고는요. 남들이 보기엔 다소 의아할 수 있어요. 압구정 사는, 변호사 집 딸. 태어나자마자, 일 년에 두 번은 꼬박꼬박 장기 해외여행을 챙겨서 갔죠. 저희 엄마는 예쁘기로 아주 유명한 분이었어요. 특권인지도 모른 채 한강뷰 넓은 집에 살았고, 저보다 더 넓은 집에 사는 친구들 집에 놀러갔죠. 생일이면 친구들로부터 그 해에 새로 출시된 게임기를 받았습니다. 닌텐도, 닌텐도 DS, PS2 그런 것들이요. 주말이면 서울 클럽에 갔고 골프랑 바이올린을 배웠습니다. 대형 세단을 타고 다녔고요. 겨울에는 스키 리조트에서 친구들 가족들이랑 시간을 보냈어요. 제가 직접 돈을 벌어보는 지금에야 비로소 조금 깨닫는 건데요. 저희집 꽤 여유로웠던 것 같아요.

5년 전, 저는 집에서 가출했고 모든 혈연과 연락을 끊었습니다. 가출 시도는 여럿 있었어요. 한 번은 학교 등록금을 반환받아 강남에 작은 원룸을 잡고 몰래 살았었습니다. 그러나 번번히 실패했죠. 돈이 없었거든요.

15년 전 정도부터 우울증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그 때 반회장이자 전교 회장단이었고, 교내에 모든 종목의 상을 휩쓸었으며, 성적으로도 전교 1등이었어요. 친구도 꽤 많았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모든 게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겉으로는 똑같았어요. 그런데 속이 문드러지기 시작했어요.

학교에서 저는 꽤 유명했습니다. “앞으로 크게 성공할 것 같은 사람” 이라는 투표를 하면, 항상 모두가 저를 꼽았어요. 저는 그들을 모르지만, 모든 학생과 학부모가 저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제 일거수일투족, 제가 가는 모든 데이트가 장안의 화재가 되었죠. 인기도 꽤 많았어요. 동네에서 잘생기기로 유명한 남자애들이랑 항상 데이트를 했거든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아침에 일어나는 게 너무 힘이 들었고, 학교 가는 것도 힘이 들었고, 모든 게 너무 힘들어서 학교에서 항상 자고 있게 되었습니다. 머리도 감지 않았어요. 밥을 점점 먹지 않게 되었어요. 아무것도 소화가 안 됐거든요. 전교 학생회였는데 아무 것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들과 친했는데 그 점을 악용해서 출석 기록을 조작하고 점심 때마다 무단 외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에 지각하는 일이 잦아졌고, "모범”이어야 할 제가 불량하게 행동하니 친구들도 점점 마음을 돌렸죠. 학교에서 소위 잘나가는 “양아치” 친구들 중 일부는 저를 괴롭히려 했고, 일부는 이틈을 취해 친해지려 했어요. 기존에 저를 감싸주던 친구들은 은근히 저를 조롱하고 왕따시키기 시작했고요. 저는 점점 학교에 나오지 않게 되었어요.

무슨 일이 있었냐고요? 집에서 저는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학대를 당하고 있었어요. 중1이었던 14살 겨울부터 엄마가 밥을 안 주기 시작했습니다. 시작은 사소한 싸움이었어요. 전교 1등에 학생회장인 딸이랑 싸울 게 대체 뭐가 있냐고요? 핑계는 그런 것들이었어요. “학교에 5분 지각했다.” “학원 숙제를 안 했다”, “학원을 1시간 땡땡이 쳤다”. 뭐 그런 아주 평범한 것들이요.

아, 기억나요. 제가 재수없다는 것도 이유였어요. 한 번은 영어 대회에서 상을 타서 엄마에게 자랑했는데, 그걸 듣자마다 엄마가 제 앞에서 동생에게 제 욕을 했어요. “지 잘난 줄 알고 잘난 척 하는 꼴 봐라. 저러니까 사람들이 싫어하지. 저런 걸 누가 좋아해.”

어느 날부터인가, 밥을 안 주더라고요? 정확한 이유는 기억이 안 나는데, 엄마 말을 안 들었단 이유였어요. 당시 저는 용돈을 안 받았어요. 역시 한 고집하는 저인 터라, 절대 지지 않고자 저는 그 겨울 내내 친구들 집을 전전하며 친구들 엄마에게 밥을 빌어먹었습니다. 이때 또 라면을 정말 많이 먹었던 것 같아요. 제 노트 필기가 인기가 많아서 항상 대기자 명단이 있었는데, 노트를 빌려주면 그 대가로 친구들이 제게 떡볶이나 아이스크림을 사줘야했죠. 그렇게 모든 500원, 1000원짜리 라면과 떡볶이로 끼니를 떼우고 학원에서 잤어요. 그렇게 시간을 떼우다가 시간이 안 가면 학교 운동장에 앉아서 멍하니 하늘의 별을 세었죠.

밥 안 주는 건 그 뒤에도 계속되었어요. 이때 라면만 먹을 수는 없어서 조금씩 요리를 배웠어요. 제가 그런데도 여전히 “엄마 말을 안 듣자”, 엄마는 저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엄마가 하던 짓들을 남들이 알까봐, 무서웠던 것 같아요. 밤이면 제 방에 들어와 손전등을 키고 제 일기장을 뒤졌고, 제 책상 서랍을 뒤져 제 연락처에 있는 모든 친구와 데이트했던 모든 남자의 신상조사를 단행했습니다. 어떤 집에 사는지, 부모님은 뭐하는지, 어느 학교 다니고, 성적은 어떤지 낱낱이 알아냈어요. 새벽에 인기척을 느끼고 일어나면 새카만 방 안에 엄마가 가방을 뒤지거나 제 폰을 읽고 있던 탓에, 불안해서 잠을 못 자기 시작했어요. 밥 못 먹고, 잠 못 자니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학교에서 저는 여전히 전교 5등 안에는 들었죠.

어느 날 휴대폰이 끊겼어요. 밤에 친구랑 대화하느라 자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어요. 그리고 엄마가 어느 순간부터 제 방에 들어와서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을 함께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책상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면 뒤에 침대에 누워서 저를 지켜보는 식이었어요. 학교가 끝나면 바로 차로 픽업해서 학원에 내려주고, 학원이 끝나면 지키고 있는 식이었죠. 숨이 막혀서 학교가 끝나고 한 번 친구네 집으로 도망친 적이 있었습니다. 한시간쯤 가서 친구랑 mp3 듣고 노래 부르고 노는데, 친구집으로 전화가 왔어요. 경찰서인데 실종 신고 하러 어머님이 오셨다고요. 그 뒤로는 엄마가 허락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는 게 금지됐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요.

어느 날부터인가 불면증이 제 친구가 되었습니다. 엄마를 피하려고 12시까지는 내내 운동장을 빙빙 돌다가, 엄마가 잠들었을 것 같을 때 조용히 숨 죽인 채 들어와 누웠지만 새벽 세네 시까지 잠 못 이뤘죠. 아침에 엄마가 깨워주는 게 무서웠거든요. 매일 아침에 침대 머리맡에 엄마가 앉아있었어요. 제 머리에서 30cm 쯤 떨어진 벽에 붙어 앉아서, 무표정으로 휴대폰 게임을 항상 하고 있었어요. 아침에 잠을 깨는 과정이 꽤 고역이었어요. “효과적으로 깨워준다”는 이유로 화분용 분무기로 수십번씩 제 얼굴에 물을 뿌리던가, 한겨울에 제 얼굴에 대야로 찬물을 부운 적도 있고요, 한 번인가는 제 침대가 꽤 높은데 발로 밀어서 저를 바닥에 떨어트리는 바람에 머리를 부딪혀서 깬 적도 있었습니다. 때로 학교갔다 돌아오면 학교에 지각했다는 이유로 맞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기억이 사실 많이 지워져있어서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머리채를 잡고 바닥에 던져지거나, 발로 얼굴을 밟히는 정도였어요. 잠들 때마다 너무 무섭고 긴장되어서 밤에 잠 못 드는 게 그때부터 지금까지 습관이 되었습니다.

뭐가 잘못 됐던 건지 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학교에 지각했거나, 반항했다는 엄마의 그 이유도 믿기는 힘들었습니다. 그 질문을 평생 품고 지난 15년을 살았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대체 생모라는 사람이 자식에게 왜 그랬던 건지, 어떻게 인간이 인간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하려 애쓰는 과정의 연속이었어요.

지금은 알아요. 제가 잘못한 건 없다는 것을. 다만 제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는데 15년이 걸렸어요. 불면증은 아직도 있어요. 당시에 소화불량이 너무 심해서 급식을 안 먹고, 캔커피에 라면으로만 몇 년을 끼니를 떼운 덕에 몸이 너무 약해져서 몇 년 뒤 건강검진에서 골다공증이 나왔었어요. 아무도 저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어요.

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냐고요? 엄마가 저와 모든 사람을 이간질했습니다. 저에게 아빠가 저를 싫어한다고 했어요. 제가 너무 털털하고 남자같이 걸걸하게 웃어서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여자 같이 아양 떨지 않아서 정떨어진다고 했어요. 짧은 청바지를 입고 다녀서 창녀라고 불렀다고 했어요. 아빠랑 간혹 둘이 밥을 먹고 들어오면 지옥이 펼쳐졌습니다. 무슨 얘기를 했느냐, 아빠가 너만 편애해서 좋겠다, 자기도 아빠 딸하고 싶다며 그런데 아빠가 네 욕을 하는 것을 아느냐. 라며 아빠의 말을 빌어 몇 시간 동안 문을 닫아놓고 제 방에서 나가지 않은 채 온갖 인격적 모독을 쏟아부었습니다. 저는 그게 무슨 뜻인지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빠가 나를 싫어한다는 사실은 이해했습니다.

제 얘기를 들어주던 과외 선생님들은 걱정되어 엄마에게 이야기를 하는 순간 잘렸어요. 명절에 할머니한테 얘기하면 또 몇 시간 동안 엄마 모욕하지 말라며 욕을 들었어요. 어느 때부터는 엄마가 저를 물리적으로 미행하기 시작했어요. 어떻게 감시망을 피해 나가서 카페나 성당에 앉아있다가 뒤돌아보면 엄마가 바로 뒤에 앉아있었어요. 집에 돌아오면 어느 때부터인가 매번 방이 도둑든 것처럼 엉망으로 뒤집어져 있었어요. 엄마 물건을 훔쳤는지 보려고 그랬대요. 그렇게 살았어요.

이게 잘못된 건지 몰랐어요. 다들 이러고 사는 줄 알았거든요. 다행인 건 이 악물고 공부해서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로 도망쳤단 거에요. 물론 엄마는 따라왔어요. 저한테 한 번도 말한 적 없었는데 집에서 1시간 거리인 학교 안에서 몇 번 마주쳤거든요. 나중에 들어보니 3년 동안 학부모회를 활발하게 했대요. 저를 감시하려고 따라왔던 거죠. 여차저차, 또 기숙사가 있는 학교로 가야했어요. 그렇게 연세대까지는 입학을 했는데, 입학하자마자 저는 무너졌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아침에 일어날 수가 없었어요. 친구들은 신이 나서 MT고, 미팅이고 매일밤 나가며 화장하고 옷을 사러 다니는데 저는 방에 처박혀 하루에 잠을 19시간씩 잤어요. 물 마시러 가는 것을 잊어버려서 열이 나고 어지러워 병원에 갔는데 탈수를 진단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강의도 나갈 수가 없었고, 손 끝 하나 들어 휴대폰 보는 것도 힘들었어요. 몸에서 힘이 모두 빠져나간 것 같았어요. 19시간을 자도 잠이 왔어요. 눈이 너무 무거웠어요. 아픈 곳도 없는데 모든 게 아팠어요. 살아있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이러다 죽겠다 싶어서 일탈을 하기 시작했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속에서 아무 감정이 안 느껴졌거든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기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뭐라도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모든 짜릿한 것들을 하기 시작했어요. 게임, 술, 담배, 클럽, 등 엄마가 하지 말라는 그 모든 것들. 몇 달은 하루에 20시간씩 앉아서 게임만 하는 게임중독이었고, 몇 년은 매일 소주 몇 병을 마시는 알코올 중독이었습니다. 오토바이를 사서 새벽에 도로를 전속력으로 질주했어요. 그러면 뭐라도 느껴질까. 나를 계속해서 망가뜨렸어요. 죽고싶었거든요.

그런데 우습게도, 좀처럼 안 죽더라구요? 오토바이를 몇 년을 탔는데 여태 무사고고요. 술을 아무리 마시고 필름이 수없이 끊겨도 깨어나면 집이었고, 발도 맨들맨들한 게 집에 와서 샤워까지 하고 자는 게 술버릇이더군요. 웃긴 거 뭔지 아세요, 담배도 피기 시작했는데 몇 년을 피고 나서야 안 게 저 몇 년을 겉담배만 피웠던 거더라구요. (겉담배 - 연기를 패까지 들이마시지 않아서 진짜로 피는 게 아님.) 새벽에 배달음식을 시켜서 매운 음식으로 폭식을 하기 시작했는데 타고난 체질 때문에 살도 안쪄요. 잠 안 오는 밤에 클럽에 가기 시작했는데 사교성이 좋은 탓에 모든 클럽 MD들이랑 친구가 되어버려서 다들 저를 무사귀가 시켜줬어요. 학교도 잘 안 나가는데 교수님들이 저를 이뻐해서 차로 학교까지 가끔 픽업해주고 주말에 점심도 사줬어요.

웃기죠. 지금 생각하면 무슨 온 우주가 저를 보호해줬던 것 같아요. 큰 사고 없이 건강하게 여태 살아있을 수 있게 말이에요. 그렇게 저는 저를 파괴하는데 실패했어요.

서른이 코앞인 저는 지금 발리에서 호텔을 짓고, 글을 쓰며 꽤 괜찮게 살고 있네요. 저는 이제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행복이란 게 무슨 느낌인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지만, 조금은 이제 알 것 같기도 해요. 잔잔하고 평화롭고 아침에 일어나면 모든 일에 감사한 느낌. 오늘 하루가 잘 풀릴 것 같은 느낌이 들고, 거울에 비친 내가 예쁘고 사랑스러워보이는 날들이 있어요. 더이상 하루에 19시간씩 자지도 않고, 3일에 한 번은 운동을 하고, 건강하게 저칼로리 고단백 영양식으로 챙겨먹고, 푹자고, 친구들에게 기대는 법도 배웠어요. 사람들을 믿는 건 여전히 가끔 힘들지만 모든 사람이 나쁜 사람이 아니란 것도 이제는 조금씩 믿게 되었어요. 제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란 것도, 착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것도. 이제는 조금씩 알겠어요.

가정 폭력을 당하고 산 사람들은 보통 다른 폭력의 가해자가 된대요. 나를 해하던지, 남을 해하던지. 세상에 해악이 된대요. 아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 그렇대요. 다른 사람을 믿을 줄 몰라서 그렇대요. 속에 쌓인 분노와 원망이 너무 커서, 어찌할 줄 몰라서, 그렇게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거래요.

한 가지 제 인생에서 참으로 자랑스러운 건, 저는 살면서 단 한번도 고의로 남을 해하거나 속이거나 이용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에요. 분명 누군가에게 살면서 상처는 줬겠지만.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사람이 되었어요. 그리고 몸도 마음도 건강한 사람이 되었어요. 저는 그게 참 자랑스러워요. 그리고 행운아라고 생각해요.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지금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게. 그 모든 일을 겪고도, 인생에서 바닥을 찍고도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것도. 사업도 두 번 말아먹고 가출하고 학교에서도 쫓겨나고 휴대폰도 6개월 끊겨보고 카드 빛도 알코올, 게임 중독, 식이장애도 우울증도 공황 장애도 있었고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모든 면에서 바닥을 찍어봤지만, 너무 이른 나이에 이 모든 일을 겪은 덕에, 경제적으로 독립했고, 인생 최고로 건강하고, 멋진 사업을 하며 내가 꿈꾸던 삶을 살게 되었는데 아직 서른도 안 됐다는 이 사실이. 참으로 재밌고 사랑스럽고 자랑스럽습니다.

“왜”라는 질문을 저는 이제 멈췄어요. 때로 우린 질문을 멈추고, 사과를 듣는 것도 포기하고, 그저 잊고 용서하고, 우리 삶을 사는데 집중해야합니다. 화를 내고 억을해다가 내 인생을 흘려보내기에 우리 인생은 너무 귀하니까요. 남을 바꾸려 하기보단, 내 마음을 바꾸는 게 빠르거든요.

왜 라는 질문은 쓸모없는 질문이다. 

등산을 하다 뱀에게 물렸다 치자, 
우린 병원에 곧장 서둘러 달려가지, 
뱀더러 왜 물었냐 묻지도, 원망하지도 않으니까
회복되고서는 다시 또 잊고 등산하러 갈 테니까.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이미 벌어진 상처를 치유하고, 그저 나아가는 것 뿐. 

왜 라는 질문은 쓸모없는 질문이다. 

때로 살아있는 게 죽는 것보다 더 버겁게 느껴질 수 있어요. 그래도 꼭 살아주세요.

저도 살아있어요. 그리고 살면서 그게 제일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매일 살아있음에 감사합니다. 그 모든 일들에서 저를 두 팔 두 다리 모두 건강하게 지켜준 이 우주에게. 저를 치유해준 이 발리에게. 제 곁에 있어준 모든 사람들과 저희 고양이들에게.

그리고 감사합니다. 이 모든 걸 견디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좋은 유전자와 교육 환경을 주신 부모님께.

이 이야기가 쓰고 읽힘으로써 제 생각엔 제 “힐링”이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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